어찌합니까 ?

어찌합니까 ?

야프로 0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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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말썽꾸러기였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증언이랍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공부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었답니다.(유전인지 몰라도 저도 동일합니다)


등록금을 주면 그걸 학교에 내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중고 오토바이를 사서 수리하여(손재주는 좋았다고 합니다)타고 돌아다나기를 즐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소위 폭주족이었던 것입니다.


삼일절이나 개천절 등의 국경일에 여고생이나 여중생들을 뒷좌석에 태우고 전 속력을 질주하는 그런 폭주족 말입니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아빠는 엄마를 오토바이라는 매개체 때문에 만났고 거기서 불행한 저의 탄생이로 이어진 것이랍니다.


 


당시 엄마는 고등학교 이학년이었고 폭주족이 아빠와 만나 오토바이를 타며 즐기다가 끝내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를 태어나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막상 엄마를 품에 안고 즐기기는 하였지만 임신이 되었다고 하자 아빠는 도피 행각의 하나로 선택을 한 것이 군대에 입대를 하여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군대에 가면서 군대에 다녀와서 결혼을 하자고 한 아빠의 말을 믿은 엄마는 선택의 여지없이 할머니와 할아버지 즉 시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집으로 무작정 들어왔고 아들의 아기를 임신을 하였다는 식도 올리지 않았지만 며느리를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집안으로 들였고 그리고 시부모님들 밑에서 얹혀살면서 저라는 생명을 낳은 것이랍니다.


고등학교 이학년이던 엄마가 저를 임신하여 낳은 탓에 지금 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시장을 비롯한 외출을 함께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아버지에게 늦둥이를 두셔서 좋겠다고 말을 할 정도이기에 저와 나이차이도 그렇게 많아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 하는 것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할아버지 역시 할머니하고 군대에 나녀오자마자 결혼을 하셨기에 더더욱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가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돌아 온지 세 달 만에 맞벌이를 하러 나간 엄마 대신에 저를 키워오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엄마는 저를 돌보느라고 맞벌이를 다니지 못 하게 되었고 말이 좋아야만 일을 나가시는 노가다인 할아버지와 공장에서 쥐꼬리만큼 받는 월급이로 생활을 하기 힘들게 되자 아빠는 공장을 집어치우고 고등학교 때부터 폭주족으로 살면서 익혀 손재주를 자랑을 하던 오토바이 만지는 기술 하나만 믿고 조그만 가게를 하나 얻어서 오토바이 수리를 겸하여 중고 오토바이를 매매를 하기 시작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진짜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도둑질을 한 오토바이를 헐값에 구입을 하여 수리 도색을 한 후에 팔기 시작을 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장물아비로 불구속이 되기를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전문 장물아비라는 오명과 함께 구속이 되었고 이 년 이라는 형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엄마는 어린 젖먹이인 저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 이 일 저 일을 하였으나 아빠의 만기 출소를 한 달을 앞두고 세 들어 살던 집의 보증금 중에 절반을 집주인으로부터 달세를 올려준다고 하고는 받아 낸 뒤에 그 중에 한 달간 할아버지가 저를 양육할 비용만 남겨두고는 시아버지인 저희 할아버지에게 돈을 벌어서 오겠다는 쪽지만 남기고 가출을 해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지나가는 소문으로 알게 된 사실은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리며 따라다니던 할아버지의 노가다 동료와 눈이 맞아서 야반도주를 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엄마의 행방은 묘연하였고 아빠가 출소를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아들이 아빠에게 자기의 동료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였다고 말하지 못 하고 그냥 무단가출을 하였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출소를 한 아빠는 엄마를 찾아서 돌아오겠다고 하고는 출소를 한 이틀 뒤에 집을 나갔고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하여 저의 불행한 조손 시대의 서막이 오른 것이랍니다.


그게 제 나이 겨우 네 살이 되던 해에 생긴 일입니다.


 


방을 두 개를 사용하기에 집세가 많이 들자 할아버지는 단칸방으로 옮겼고 그도 비닐 하우스촌의 방 하나를 얻은 것입니다.


맑은 날이면 할아버지는 저를 혼자 집에 남기고 노가다를 가야 하였기에 저는 혼자서 노는 것이 익숙해져갔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은 우리 할아버지와 손녀인 저를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겨우 일곱 살이라는 나이가 먹었던 어느 날 우리가 살던 비닐하우스 촌이 화마에 휩싸였고 그 바람에 엄마아빠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이며 옷가지가 모조리 화마에 휩싸여 검은 재로 변하였고 그리고 엄마아빠에 대한 희미한 기억마저 송두리째 제 뇌리에서 사라지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저를 남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이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날도 저는 평소처럼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깜깜한 깊은 밤 저의 거기에 노가다를 하느라고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 진 나머지 까칠까칠하게 느껴지던 할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졌고 그 느낌은 싫은 것이 아니라 묘한 느낌이 들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저는 점을 자지 않고 은근하게 까칠까칠한 할아버지의 손길을 거기에 닿기를 기다려졌습니다.


거기는 바로 부드럽지만 밋밋하기만 한 제 보지였습니다.


 


“현지 너 안 잤구나?”제가 잠을 자지 않고 할아버지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가 알게 된 것을 초등학교 이학년 말이었습니다.


저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알게 된 것입니다.


“몰라”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저는 할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좋나?”할아버지가 벽에 달린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서도 제 보지를 만지는 손은 빼지 않으며 물었습니다.


“모른다니까”하고 말하자


“그럼 왜 숨을 헐떡이니?”할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글쎄 모른다니까”하고 대답을 하며 부끄러운 마음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이게 뭐 하는 것인지는 아니?”할아버지가 계속 제 보지를 만지며 아예 팬티까지 벗기며 물었습니다.


“부끄러워 불 꺼”하고 말하자


“뭐 하는 것인지 아냐고?”아예 손바닥으로 보지둔덕을 문지르며 물었습니다.


“몰라 뭐 하는 거야?”하고 되레 묻자


“이것을 여기에 넣고 하얀 물을 싸면 아기가 생겨"하고 말하면서 할아버지는 저의 손을 당겼고 그리고 할아버지 팬티 안으로 이끌더니 딱딱해진 뭔가를 제 손에 쥐어주기에


“이게 뭐야”하고 놀라며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가 제 손에 쥐어준 덕을 내려다보자


“좆이야 좆”하고 한하게 웃으며 말하기에


“이게 여기에 들어온다고?”할아버지의 좆을 주물럭거리며 제 보지를 가리키자


 


어찌합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아직 넌 어려서 이게 박히지는 못 하겠지만.....”하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아쉬운 뭔가가 남은 듯하였습니다.


“애들 고추 보니까 이렇게 딱딱해 보이지는 않던데?”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묻자


“물론 그래 애들 고추니까”하고 웃으며 대답하기에


“이렇게 종일 그래?”하고 다시 묻자


“아니 그런 것은 나중에 조금 크면 알려줄게”하고 말하였고 그날 이후부터는 제가 잠이 들지 않아도 제 보지에 손을 대고 놀았습니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저에게 좆을 잡고 흔들라고 하여 할아버지가 말하던 하얀 물 즉 좆 물을 쌌고 그걸 휴지에 닦아 화장실에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흔들어서 하얀 물을 빼는 방법 빼는 것을 자주 해 봐서 알겠는데 할아버지 입에 어떻게 닿아서 빨아?”의아스러운 눈으로 할아버지 얼굴과 좆을 번갈아보며 물은 것은 제가 사학년에 올라가서의 일입니다.


“물론 나야 못 빨지 하지만 너는 할아버지 좆을 빨 수가 있잖아”하고 말하기에


“더럽잖아? 또 입에 싸면 냄새도 고약하고”하고 말하자


“그런 여기서 나온 하얀 물로 만들어진 현지도 더럽니?”하고 묻기에


“아니”하고 대답을 하자


“그럼 할아버지는 현지 여길 빨아주고 현지는 할아버지 이걸 빨아주기 할까?”하고 말하며 눕더니


“싫어”하고 대답하자


“할아버지 좆에서 나온 물 먹으면 현지 젖가슴도 커지고 엉덩이도 커진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당시에 저에게는 시쳇말로 콤플렉스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반의 여학생들 중에 중키를 훨씬 넘는데도 다른 계집애들과 달리 밋밋한 젖가슴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정말이야?”토끼눈을 하고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할아버지 말을 못 믿어 벌써 이 년이라 이렇게 하며 놀고도”하고 말하면서 할아버지가 방바닥에 앉아서 자신의 좆을 주물럭거리고 있는 저를 번쩍 들더니 보지 쪽을 자신의 머리로 향하게 하고 제 머리를 딱딱한 할아버지의 좆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배를 마주대게 하고 올렸고 몸을 비틀기도 전에 이미 할아버지의 손과 같이 까끌까끌한 혀가 제 부지둔덕을 빨기 시작하였고 그 감촉은 까끌까끌한 할아버지의 손길과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좆을 잡고 용두질만 쳐 주다가 새로운 경험을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그 동안 할아버지가 노가다를 하여 벌이가 신통치 않아 영양결핍으로 저의 성장 발달이 늦은 것으로 알았지만 할아버지의 비릿하고 역겹기까지 하던 좆 물을 먹기 시작하고 그해 겨울 저의 젖가슴은 언제 그렇게 밋밋하기만 하였냐는 듯이 제법 봉긋하게 솟아올랐고 그러자 할아버지는 봉긋하게 올라오기 시작한 젖가슴도 빨아주자 오학년이 올라갔을 때는 다른 계집애들에 비하여 결코 작은 젖가슴이 아니었습니다.


 


참 그렇게 할아버지의 좆 물을 먹기 시작을 하면서 생긴 다른 놀이가 있었습니다.


좆 물을 모조리 먹이지 않고 조금 남은 좆 물을 제 보지에 좆을 대고 싼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기를 배면 안 된다고 하며 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거의 강제로 저를 눕히고 보지 금을 벌리는가 싶더니 좆을 제 보지구멍입구에 대고 나머지 좆 물을 싸자 뜨거운 것이 제 보지구멍으로 파고드는 그 느낌이 너무나 색달라 그날 이후로는 제가 할아버지에게 좆 물을 입에 다 싸지 못 하게 좆 물이 흘러나오는 길인 좆의 뒷부분의 불록한 곳을 손가락으로 조이고 나서 제가 누우면 제 보지에 자신의 좆을 대고 할아버지가 저의 손길로부터 인수받은 조인 부분을 때면 뜨거운 좆 물의 나머지가 제 보지구멍과 보지둔덕에 흘러 넘쳤습니다.


그런 놀이는 거의 밤이면 밤마다 계속이 되었습니다.


물론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았지만 저에게 학교에서 가르쳐준 성교육은 아무런 도움이 되즐 못 하고 되레 더욱더 할아버지와 짠하게 놀게 만드는 가교 역할을 하게 만들기만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오늘은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한 번 박아“하고 말하자


“아직은 아니야”하고 제 입에 좆을 넣고 빨게 하려고 하였으나


“싫어 그럼 오늘부터 빨지 않을 래”하고 투정을 부리자


“현지야 이제 중학생이 되는 기념으로 우리 한 번 넣어 볼까”하고 할아버지가 저에게 마지 못 해 대답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도 할아버지의 좆을 입에 물고 빨고 흔든 후에 일부는 제가 삼키고 일부는 제 보지구멍에 넣었지만 지금까지도 기적이라고 생각을 하는 부분은 초등학교 오학년 말부터 생리를 시작하였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성교육에 따르면 여자의 경우 생리가 시작되면 가임을 할 수가 있기에 절대 남자의 정액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 이전부터 받아들이기 시작을 하였고 중학교에 올라가는 마당에 까지도 한 번도 임신을 하였다는 증거라고 하는 생리가 끊기는 현상이 발생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헤헤헤 박아보고 싶어”할아버지의 좆을 주물럭거리다 말고 말하자


“그렇다면 해 볼까? 하긴 이제 현지도 중학생 아니야? 어디선가 들었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하기 시작을 한 애도 있다고 들었거든”하고 말하며 제 보지둔덕을 손바닥으로 문질렀습니다.


할아버지의 그런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더욱이 열악한 비닐하우스 촌에서 계집애들 보지는 정조가 아니라 노리개였습니다.


우리 집괴 이웃해 살고 있던 영심이란 애는 오빠와 근친상간을 하면서도 용돈을 준다고 하면 그게 누구이던지 가리지 않고 벌려주었고 그런 영심이가 남자를 받아들인 것은 초등학교 삼학년 때부터였다고 같은 반이었던 육학년 때 저에게 고백하였고 저 보고도 용돈이 필요하면 자기를 따라가서 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저의 경우 제 마음속에 유일한 남자인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고 싶으면 해”허고 말하는 저는 할아버지의 좆을 보지구멍으로 받아들일 각오가 이미 되어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할아버지의 좆을 빨고 흔들다가 좆 물이 나오면 삼키다가 얼마 안 남았다 싶으면 지 보지구멍에 좆 대가리를 맞추게 하고 나머지 좆 물을 보지구멍으로 받았다고 했었지요.


그게 반복이 되면서부터 할아버지의 좆 대가리 부분이 제 보지구멍에 박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처음에 비록 좆 대가리부분만 박혔다가 하지만 아팠었지만 회가 거듭 할수록 아픔도 사라졌고 아프기 보다는 더 깊이 박아 주기를 은근히 바랬지만 할아버지는 결단력이 부족하였던지 아니면 친손녀라는 부담감에서 인지 좆을 전부 박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박겠다고 하는데 마다할 제가 아니었습니다.


 


“으~안 아프니”할아버지가 아주 조심스럽게 좆을 제 보지구멍에 다고 물렀고 박히고 나자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의 얼굴과 자신의 좆이 박힌 제 보지구멍을 번갈아보며 물었고


“할아버지는? 이전에도 단 안 박혔지만 대가리가 박힌 적은 한두 번이 아니잖아?”하고 눈을 흘기며 말하면서 저도 고개를 들고 할아버지의 굵고 긴 좆이 박힌 제 보지구멍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며 말하자


“흐흐흐 그건 그려 박히니 느낌은 어때?”할아버지가 아주 미세하게 펌프질을 하며 물었습니다.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아”하고 할아버지 목에 매달리며 대답을 하자


“현지 너도 하고 싶었니?”할아버지가 본격적으로 펌프질을 하며 물었습니다.


“응”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이웃에 사는 영심이의 말에 따르면 오빠하고 처음 하면서 무척 아팠다고 하여 속으로 걱정을 하였었지만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듯이 비록 좆 대가리 부분만이지만 간혹 박혔었기에 처음 좆 대가리가 박혔을 때에 비하여 전부가 박혔어도 아프다는 기분은 전혀 없었고 다만 아랫배가 뻐근하다고 느껴졌고 또 보지구멍이 빠듯하다고 느껴질 정도였기에 우리한 느낌도 들기는 하였지만 그리 싫지도 않았고 후회가 되지도 아니하였으며 되레 진짜 할아버지의 여자가 되었다는 느낌이 저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중학교에 올라가기 직전에 할아버지에게 받은 중학교 입학 선물 치고는 최고의 선물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박고 펌프질을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할 것인데 일부는 삼키고 일부만 보지구멍에 넣어주던 좆 물을 모조리 보지구멍으로 넣어주어 최고의 뜨거운 느낌까지 안겨주었습니다.


 


어찌합니까?

 


고맙게도 그도 한 번으로 끝은 낸 것이 아니라 입학식을 하기까지 쉬는 기간이라 학교에 갈 필요가 없을 뿐더러 밖에 비까지 촉촉하게 내려 직업라고 할 것도 없지만 비가 오면 집에서 쉬는 노가다이기에 다음 날 일을 하러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할아버지는 새벽 동이 틀 무렵까지 쉬었다고 다시 하기를 반복하여 아침에 할아버지가 세수를 하면서 흘리지도 않던 코피를 흘릴 정도로 수도 없이 많이 제 보지구멍에 좆을 박고 싸 주어서 저 역시 아침에 화장실에 가면서 걷기가 힘들 정도로 아랫도리가 뻐근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말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저의 고백을 읽으시는 수많은 독자들께서는 저희 할아버지를 겨우 초등학교 졸업반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손녀를 먹은 철면피라고 욕을 하실 것입니다.


저는 분명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뱃속에서 할아버지의 아이가 자라고 있으며 중학교 입학식을 몇 칠 앞두고 할아버지와 관계 아니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빠구리를 하였지만 저는 그보다 훨씬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좆을 제 보지구멍 깊게 박으라고 사정을 무던히도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자신이 저에게 행하는 짓이 나쁜 짓이고 그래서 더 이상 진전을 시키지 않으려고 하였고 저는 틈만 나면 박으라고 하였고 할아버지의 좆 물을 삼키고 적은 양이지만 다 싸지 않은 좆물을 제 보지구멍 안에 싸려고 좆을 보지구멍 입구에 대었을 때 엉덩이를 들어 올려 제 스스로가 할아버지의 좆이 박히도록 하려고도 하였지만 할아버지의 힘에 밀려 실패를 하였고 실패를 한 후에는 혹시나 제가 다시 시도를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좆 물을 제 보지구멍에 마저 싸려고 할 경우 한 손으로는 좆을 잡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가래토시 부분을 눌러서 엉덩이를 들지 못 하게 미연에 방지를 할 정도였습니다.


중학교 입학식을 하기 몇 칠전부터도 저는 입학 기념으로 박아달라고 통사정을 하였고 그날 할아버지는 저의 간절한 애원에 마지 못 해 자신의 좆을 친손녀인 제 보지구멍에 박았던 것입니다.


하오니 절대 우리 할아버지를 파렴치한으로 보지는 말아 달라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렇게 중학교 입학 기념 선물이나 다름없이 할아버지의 좆을 받아들인 후부터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할아버지와 빠구리를 하였습니다.


물론 할아버지가 피임약을 구하여 주어서 그 피임약을 복용 방법에 따라서 먹으면서 말입니다.


마이보라라고 하는 피임약을 구하여 주었는데 저에게는 살이 조금 찌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가장 싸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부작용의 부자도 꺼내보지 못 하고 한 달에 31일 동안 매일 같이 복용을 하여야 하였습니다.


한 번인가 할아버지가 어디에서 구하였는지 콘돔을 구하여 와서 할아버지 좆에 끼우고 하였으나 이물감이 싫고 또 직접 보지구멍 안으로 좆 물을 받고 깊은 마음에서 남은 콘돔을 할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가위로 잘라버리자 할아버지는 다시는 콘돔을 구하여 오지 않았습니다.


 


여자랑 요망한 동물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남자도 호기심이 있기에 자기 남편이나 애인을 두고서도 곁눈질을 한다고 하지만 여자인 저도 인간이기에 호기심이 났습니다.


 


엄마라는 여자가 장물아비라는 죄목으로 아빠가 교도소에서 감옥을 사는 동안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리며 따라 다니던 남자하고 붙어먹었다는 말에 적어도 저는 그렇게 살지는 말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지만 늙은 할아버지의 좆과 제 또래의 남학생들 좆하고는 어떻게 차이가 날 것인지 궁금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습니다.


중학교 이학년 때의 일입니다.


몸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삼학년 언니오빠들과 같은 장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삼 학년 다 합쳐봐야 몇 명이 안 되었기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놀이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공부 쪽으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즐겨 하였고 그런대로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만 같은 반 친구들에게 등을 떠밀려서 나가야 하였고 춤을 곁들인 노래를 부르자 이삼 학년 남학생들은 무더기로 나와서 저의 노래를 따라 춤을 추었고 삼학년 선배 오빠가 그윽한 눈으로 저만 바라보며 춤을 추기에 저도 모르게 눈웃음으로 보냈고 그 오빠는 제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지 소풍 장소에서 해산을 하고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고 봤더니 그 오빠였고 순간적이었지만 저와 시선이 마주치자 윙크를 날렸고 저도 그만 무의식중에 윙크를 날렸고 같은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제 곁에 바짝 붙어 서서 딱딱해진 좆을 제 몸에 대고 비비자 그만 할아버지의 좆으로 착각이 되었던지 만져버렸고 집 근처 정류장에서 내리자 따라 내리더니 저를 계속 따라왔고 마침내 제가 사는 비닐하우스 촌까지 따라왔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얼마 떨이 진 곳까지는 친구들과 동행을 하였지만 하나하누 뿔뿔이 흩어지며 비닐하우스 근처까지 왔을 때는 여학생은 저만 남아있었고 그 오빠는 마치 자주 만났던 구면인 것처럼 제 곁에 바짝 붙어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더니 저에게 산 쪽을 가리키며 거기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하였습니다.


제 의도대로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한참을 빼다가 못 이기는 척 하고 그 오빠의 말 대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무숲으로 들어가자마자 뒤돌아서더니 저를 끌어안으며 노는 모습을 보니 이미 놀아본 것 같았다며 노골적으로 빠구리 경험이 있었을 것이 뻔하다 고 말하면서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냐며 한 탕 하자고 말하며 제 젖가슴을 마구 주물렀습니다.


할아버지가 주무르던 제 젖가슴을 몇 번의 일면식만 있던 오빠의 손에 의하여 주물림을 당하자 색다른 느낌이 들어 흥분이 되었습니다.


흥분을 하기 시작한 저의 몸은 이미 그 오빠의 손에 의하여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어찌합니까?

 


이윽고 제가 의도 한 그대로 그 오빠의 손에 의하여 교복 안에 숨겨져 있던 팬티가 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손에 의하여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오빠가 저를 나무를 짚고 엎드리게 하였습니다.


엎드리는 순간 뭔가가 들어 온 느낌은 들었지만 성인인 할아버지 좆이 보지구멍으로 들어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어떻게 표현을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까요.


아~하! 그렇게 표현을 하면 되겠군요.


할아버지의 굴고 긴 좆이 제 보지구멍에 들어 왔을 때는 벌어진 제 입으로 어른의 주먹이 거의 억지에 가깝게 들어 왔다고 한다며 중학교 삼학년에 지나지 않은 그 오빠의 경우 크게 벌이진 제 입안으로 겨우 손가락 하나가 들어온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그 오빠의 좆이 박힌 제 보지구멍은 그 오빠의 박힌 좆의 느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리를 모으고 똥구멍에 힘을 주자 겨우 뭔가가 박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 펌프질의 느낌도 조금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흥분은 되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미 대어주기 시작 한 것 어서 싸고 물러나면 해방이 되겠구나 하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좆 맛은 우리 할아버지의 좆 맛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깨달은 후로는 다시는 다른 남자에게 벌려주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에게는 할아버지의 좆이 유일 무일한 좆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리를 할 때 말고는 거의 매일 저는 할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잘 먹고 잘 살지는 못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노가다로 잔뼈가 굵어진 탓에 보약 한 첩 먹지도 못 하였지만 체력은 대단하여 제가 먼저 지쳐서 그만 하자고 애원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중간에서 포기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작년 음력으로 8월이 되기 이틀 전에 할아버지가 무당에게 다녀왔습니다.


마당은 할아버지가 아빠의 생사 여부를 묻자 이미 죽었다고 하였고 추석에 밥 한 그릇을 아들 목으로 올리라고 하면서 추석 때까지 몸가짐을 바로 하라고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온 할아버지는 저를 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피임약의 부작용(살이 쪘음) 때문에 안 그래도 걱정이었던 저는 피임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추석날 제사를 모시고 나서 제사상을 물리자마자 할아버지가 저를 품어주었습니다.


괜찮겠지 하고 넘어 간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 다음 달 생리가 끊겼습니다.


간혹 생리불순이 있던 저는 생리불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다음 달도 생리를 없었습니다.


중절수술을 하려고 할아버지에게 임신 사실을 고백하려고 마음도 먹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경기에 주택 경기마저 바닥을 치고 있어 한 달에 열 대가리 아니 다섯 대가리 정도를 겨우 하여 겨우 입에 풀칠을 하기에도 급급해 하는 할아버지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게 되면 할아버지의 안 그래도 늘어나는 주름살을 더 늘어나게 할 수가 없었기에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미 칠 개월째 접어들었고 저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복대를 하고 다니고 있으며 아무 것도 모르는 할아버지는 제가 피임약의 부작용에다가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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